“엄마라고 부르면 혼났다..” 유명 가수였던 엄마 공개하고 듀엣 무대까지 선 모자


가수 나미는 80~90년대를 대표하는 여가수였다.

‘빙글빙글’, ‘인디언 인형처럼’, ‘슬픈 인연’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무대를 휘어잡으며 한국의 첫 여성 댄스 디바라 불렸다.

화려한 춤과 뛰어난 가창력은 당시 다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 존재감을 보여줬다.

그러나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뒤에는 세상에 쉽게 꺼내놓을 수 없는 가족사가 있었다.

나미는 20살 연상의 매니저 겸 소속사 대표였던 최봉호와 사실혼 관계였다.

그러나 당시 그는 유부남이었고, 대중 앞에 알려질 경우 나미의 커리어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84년 아들 정철을 낳았지만, 아이는 호적상 ‘동생’으로 올라갔다.

가족이 외출할 때면 기자들의 눈을 피해 떨어져 걸어야 했고, 백화점에서 정철이 무심코 “엄마”라고 불렀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혼이 났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어린 정철은 그렇게 세상에서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한 채 자라야 했다.

1989년, 최봉호가 폭력 조직과 얽힌 살인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세상에 드러났다.

나미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옥바라지를 하며 긴 공백에 들어갔다.

결국 1995년 최봉호가 전처와 이혼한 뒤에야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할 수 있었고, 그제서야 아들 정철은 ‘동생’이 아닌 ‘아들’로 호적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미는 이미 무대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화려한 가수의 길 대신 아내와 엄마의 삶에 집중하며 오랫동안 대중 앞에 서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미가 그렇게 숨기고 지켜내려 했던 아들은 결국 음악을 선택했다.

정철은 2002년 그룹 Q.O.Q로 데뷔했고, 이듬해 솔로 가수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무대에 설수록 ‘나미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고, 대중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정철은 “엄마 이름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나미 아들’이라는 말이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는 그 이름을 당당히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는 어머니의 노래를 대신 부른다는 마음으로 노래한다”는 고백은, 감춰야 했던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한 성장의 표현이었다.

나미는 무대에서 물러난 지 15년 만에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이유는 단 하나, 아들 정철 때문이었다. 정철의 신곡 If I Could에 여성 보컬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있었고, 함께 작업하던 이가 나미를 추천한 것이다.

나미는 처음엔 고개를 저었지만, 결국 아들의 간절한 부탁에 마음을 열었다.

“이번만큼은 가수와 가수의 만남이었다”라며 모자 듀엣을 성사시킨 그녀는, 팬들에게 다시 한 번 목소리를 선물했다.

아들 정철 역시 “남들은 해보지 못할 귀한 경험”이라며 벅찬 소감을 전했다.

오랜 세월, 불릴 수 없었던 ‘엄마’라는 이름.숨겨야 했던 가족사 때문에 함께 걷지 못했던 시간.

그러나 이제 나미와 정철은 가수이자 모자로 당당히 무대에 설 수 있게 됐다.

정철은 말한다. “이제는 어머니 아들로서,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다.”

나미 역시 그를 지켜보며 조용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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