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경쾌한 빅밴드 편곡 위에 중저음의 감미로운 음색이 흐른다.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당시로선 이례적이었던 재즈풍 가요는 단숨에 한국 가요계의 판도를 바꿨고, 이 노래를 부른 신예 가수 한명숙은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1935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그는 6·25 전쟁 이후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1961년, 작곡가 손석우와의 인연으로 본격적인 데뷔를 하며 그를 대표하는 곡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발표했다.
이 곡은 일본, 홍콩 등 아시아를 넘어, 프랑스 가수 이벳 지로가 한국어로 부를 만큼 상징적인 노래가 됐다.
무대에선 늘 당당했지만, 삶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한명숙은 1956년 군악대 출신의 트럼펫 연주자 이인성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41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2남 1녀를 혼자서 키웠고, 특히 큰아들의 투병과 사망은 삶을 깊이 무너뜨렸다.
“그때 목소리가 안 나왔어요. 옆에서 말해주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해외 순회공연에서 자주 불렸고, 외국인들이 이 곡을 애국가로 착각할 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가 됐다.
1962년엔 같은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어 서울 국도극장에서 10만 명의 관객을 모았고, 엄앵란, 신성일과 함께 주연을 맡으며 스크린에서도 주목받았다.
이후에도 ‘눈이 내리는데’, ‘센티멘탈 기타’ 등 다수의 곡을 히트시키며 1970년대 후반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생전에 발표한 노래는 300곡이 넘는다.
한명숙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방송 활동을 점차 줄이며 조용한 삶을 택했다.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며 수원에 있는 10평 남짓한 임대아파트에서 지내왔고, 방문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는 모습도 방송을 통해 공개됐다.
월세방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그는 공황장애를 앓는 자녀의 치료비까지 감당해야 했고, 노후는 생각보다 훨씬 고단했다.
하지만 2013년, 안다성, 명국환 등 원로가수들과 함께 새 앨범을 발표하며 마지막까지 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대표곡이 선수단 입장곡으로 사용되며 다시금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24년 6월 22일, 한명숙은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랜 시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졌을지 모르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재생되고 있다.
노래 한 곡으로 시대를 위로하고, 오랜 침묵으로 삶의 무게를 감내했던 한명숙.
이제는 고요한 평안 속에서, 노오란 샤쓰를 입고 걸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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